대한 자살 공화국

2011. 6. 1. 03:55지속 가능한 발전 | Sustainable Development/포용성 (Inclusiveness)


국제 보건기구 WHO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자살률(10만 명 중 31명이 자살)은 세계에서 리투아니아(31.5) 다음으로 두 번째로 높다. OECD 국가 중에서는 자살 왕국이라던 일본(24.4명)을 멀찌감치 따돌리며 선두를 내달리고 있다. 이 수치는 자살률이 높다고 알려졌던 북유럽의 스웨덴(13.2명)에 비해서도 두 배가 넘는 수치이며, 그리스(2.8명)에 비해서는 10배가 넘는 수치다. 물론 이러한 통계는 대부분 각국의 통계 자료에 근거하기 때문에 통계자료 작성 과정에서 수치를 조작할 소지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이러한 조작의 소지는 모든 국가에 적용되기 때문에 부폐지수가 OECD 평균(6.9) 이하인 우리나라(5.4)로써는 딱히 변명이 될 수 없다. 우리로써는 전직 대통령이 자살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살이라는 항목에서는 전 세계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기에 충분하다. 

한 달이 멀다고 나오는 연예인들의 자살 소식. 이제는 그리 충격적이지도 의아하지도 않다. 이번에는 또 누가 죽었구나... 라는 생각할 정도로 자살 소식에 무덤덤해 지는 사실이 더욱 슬프고 두렵다. 뉴스에 나올만한 사람의 자살이 이정도면 일반인들의 자살은 얼마나 많다는 말인가...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은 어린 학생들로 부터 노년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견디지 못한 노부부까지 다양하다. 자살의 주된 원인으로는 몇 가지가 있겠지만 '우울증'이 자주 지목되곤 한다. 한국 사람들은 왜 이토록 우울한걸까? 불공평한 사회 구조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인가? 무엇이 그들을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고가는지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때인것 같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한가지만 얘기해 보자면 사회나 집단으로 부터의 '소외감'이 아닐까 싶다. 

자료: http://www.oecdbetterlifeindex.org/#/


최근 OECD의 Better Life Index에 의하면, 한국은 공동체(Community) 항목에서 10점 만점에서 터키(0점)보다 조금 높은 0.5점을 받으며 매우 빈약한 공동체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 지수는 "자신이 기댈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 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을 바탕으로 조사된 것이다. 개인주의가 만연하다는 스웨덴(9.2)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과의 격차는 매우 크게 나타나고 있이며 이웃나라 일본(5.2)과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 빈도 그리고 대인관계의 질은 사람의 행복(well-being)에 매우 중요한 결정요소가 된다. 학계에 따르면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의 양은 다른 방법의 시간활용에 비해 더 높은 수준으로 개인의 긍정적인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빈약한 사회 네트워크는 제한된 경제적 기회, 타인과의 접촉의 부재, 결과적으로는 사회적 소외감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사회적 소외감은 주로 가정의 파괴, 실직, 질병이나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비롯된다고 보고서는 보여주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의 Community 항목에 대한 해석과 대한민국이 받은 점수를 바탕으로 봤을때, 우리 사회가 매우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혼과 생계 유지를 위한 가정의 파괴는 물론이고 실직으로 인한 경제적인 어려움들은 우리 주위를 조금만 둘러봐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글을 작성하는 2~3일 사이에도 또 한 명의 축구 선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프로축구 승부조작 사건의 중심에 있던 선수가 조여오는 수사망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은 자살을 선택하고 말았다. 20~30대의 젊은이들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자살을 선택한다는 것은 국가 전체적인 비극이며 그 어떠한 전염병 보다도 심각한 사회적인 병리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회 유명인들의 자살은 여러가지 이유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결코 좋은 영향은 끼치지 못할 것이다. 그들 개인의 행위를 비판하는것은 아니다. 자살을 개인의 나약함이나 잘못된 선택으로 단정하기에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 그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차갑고 냉정하기 때문이다. 다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유명인의 선택이 비슷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나쁜 본보기가 될 수도 있다는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 

한국전쟁 이후 지독한 가난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우리의 아버지들은 자녀들에게 배고품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본인의 행복은 포기한 체 30~40년의 인생을 살아왔다. 그들이 처했던 노동 환경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마저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무럭무럭 자라나는 자녀들의 자는 모습을 보며 세상을 살아갈 힘도 얻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최근 서울대의 연구에 의하면, 실제로 베이비붐어 세대들은 자녀들을 통해 가장 큰 행복을 얻고 삶에 대한 태도도 매우 낙관적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퇴직을 하면서 가족과 사회로부터 느끼는 소외감은 매우 클 것이다. 그리고 자살률은 연령대가 올라갈 수록 더 크게 나타난다. 얼마전 웁살라를 방문한 경기도의 한 시장님의 한숨 섞인 말씀이 생각 난다. "밖에서는 다들 알아주고 대우도 잘 해 주지면 집에가면 누구보다 외로운 사람이랍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높은 지위에 있는 아버지 일수록 가정에서 느끼는 외로움은 더욱 클 것이다.

2011년을 살아가는 우리 젊은이들의 상황은 다소 차이가 있다. 우리는 배고픔을 모르고 자랐고, 그런 우리에게 사회가 요구하는 삶은 결코 행복하고 여유로워 보이지 않는다. 베이비붐어 세대들이 처했던 극빈의 상황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회사나 사회가 원하는 데로만 살기에는 삶이 너무도 불행하게 느껴진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낳아 제대로 된 교육을 시키려면 가족들과의 행복하고 단란한 시간은 포기한 체 시간외 수당을 위해 회사 일에만 메달려야 한다. 우리 아버지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을 뿐더러 배고품을 모르는 우리에게는 배불리 먹고사는 것에 대한 행복감마저 없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고 우리의 소득은 증가해 가지만 그에 따른 행복감과 삶의 질은 오히려 떨어지고 있다. 그렇기에 자괴감과 외로움은 퇴직 후가 아닌, 사회 생활을 시작함과 동시에, 아니 어쩌면 경쟁이 시작되는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

아버지들은 SONY의 워크맨을 동경하고 성공한 기업 SONY를 바라보며 열심히 일하셨다. 우리는 APPLE의 아이폰을 즐기고 창의적인 기업 APPLE을 바라보면 일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사회는 APPLE을 바라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여전히 SONY처럼 일을 하고 생각하라고 한다. 세계는 아이폰과 같은 다양성과 창의력을 겸비한 인재를 원하지만 우리의 학교에서는 워크맨처럼 반복 재생과 오토 리버스 방식의 공부를 요구한다. 워크맨이 당시에 '경제적인 부'를 상징했다면 오늘의 아이폰은 '다양함과 즐거움'을 상징한다. 그들은 분명 추구하는 바가 다르고 경험한 바가 다른데도 사회와 기업은 다양성과 창의성이 담긴 아이폰의 다양한 컨텐츠를 워크맨이라는 카세트의 틀에서 작동시키려 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자살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고 보다 행복하고 살기좋은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 성장에 촛점을 맞췄던 기업과 사회의 구조, 그리고 그 속에서 때로는 가해자로, 때로는 피해자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인식이 조금씩 바뀌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너'나 '그'가 아닌, 바로 '나' 부터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2011.11.08 <중앙일보> 영국 BBC방송, '자살공화국' 한국 심층 보도
2011.11.08 <BBC> Tackling South Korea's high suicide rates

2011.11.10 결국... 올해도 어김없이. <YTN>대전서 수험생 숨진 채 발견... 자살 추정 
2011.11.12 <NEWSis> 올해도 어김없이 수험생 잇딴 자살... 입시세태가 낳은 타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