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쓰나미?

2011. 3. 15. 07:33지속 가능한 발전 | Sustainable Development/회복력 (Resilience)


자연의 힘

2011년 03월 11일 아침. 금요일 오전마다 있는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유난히도 무거운 몸을 일으켜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샤워를 하고 우유를 챙겨서 방에 들어와 시리얼과 달콤한 크런치를 겯들여 섞는다. 평소와 다름없는 금요일 아침이었다. 메일을 확인하고 BBC 페이지에 들어갔는데 평소와 달리 'LIVE'는 빨간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일본에 지진이 났다는 내용이었고, 나는 '음... 일본이 또 지진이 났구나.' 라는 생각으로 무료로 제공하는 라이브 화면을 잠시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뭔가 달랐다. 나의 눈을 의심하는 장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쓰나미 경고를 받고 출동한 NHK 헬기에서 지금까지 세상에서 한 번도 잡지 못한 장면을 생중계 하고 있었다. 바다 멀리에서 거대한 물결이 밀려오더니 거짓말 처럼 순식간에 육지를 덥쳤고, 그 기세는 누그러 들 줄을 몰랐다. 잠시 멍 한 정신으로 화면에서 눈을 때지 못했던 나는 잘 구성된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유에 말린 시리얼은 잔뜩 부풀어 올라 있었고, 학교에 가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허겁지겁 밥을 먹고 학교에 도착해서도 그 충격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다. 일본 도쿄에서 온 친구는 여자친구에게연락이 닿지 않았다. 세미나 도중에도 나의 눈은 앞 좌석에서 생중계를 보고있는 친구의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뗄수가 없었다.

일본... 이 나라만큼이나 우리와 사연이 깊은 나라가 또 있을까. 식민 지배에 대한 원망과 분노, 그리고 한편으로는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고 세계 일류 국가로 성장한 이웃에 대한 왠지 모를 부러움과 열등감은 누구나 한 번 쯤 갖어봤을 감정인것 같다. 이토록 복잡한 감정의 이웃이 겪고 있는 아픔을 함께 나누는 한국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정'의 힘을 느낄 수가 있었다. 좋은 면만 보려고 하지만 무언가 일이 터질때마다 함께 터지는 한국 교회에 대한 비판의 소리는 쉽게 간과할 수가 없다.

특정 대형 교회 목사님들의 설교에 대한 여론의 비판이 쏟아지고 있지만, 30년 넘게 교회를 다녀온 날날이 골수(?) 신자인 나의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이것은 비단 대형 교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형 교회가 한국 기독교에 미치는 영향은 정말이지 상상 그 이상이다. 유명 목사님들의 설교가 케이블 방송과 인터넷 방송을 통해 널리 생중계 되면서 한국 기독교 신자들에게 이러한 유명 목사님은 더 이상 특정 교회의 목사님이 아니라 '우리' 목사님이 된지 오래다. 작은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도 특정 목사님의 설교 방송은 꼬박꼬박 챙겨보고 그들의 설교를 자신이 출석하는 작은 교회의 목사님과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교회 목사님들은 그들의 설교에서 감히(?) 유명 목사님이 잘못된 해석을 바탕으로 설교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자칫 잘못 했다간 그나마도 없는 성도를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작은 교회 목사님들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위험 천만한 일인가.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인정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타락함과 무지함' 아니었던가. 인간이기에 실수도 할 수 있고 잘못 이해할 수도 있고 죄를 지을수도 있는 것인데, 많은 기독교인 들에게 유명 목사님은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일말의 실수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를 전달하는 '주의 종'으로 자리메김한지 오래인것 같다.

'시험에 든' 주일학교 출신 청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분노의 쓰나미'라는 말은 쉽게 납득이 가질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을 기독교 부흥에 의한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설교를 들으면서, '그럼 일본은 왜 저렇게 큰 축복을 받았을까?' 라고 생각을 했다. 기독교의 부흥과 나라의 부가 비례관계라고 말하기에는 그 근거가 너무나도 부족하다. 무슬림이 대부분인 중동의 잘 사는 나라들의 복은 어디에서 온건가? 세계에서 가장 일찍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지금도 인구의 60%가 크리스챤인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국가들의 기독교 인구는 한국의 30%를 훨씬 능가한다. 기근과 가난에 허덕이는 아프리카는 노아에게 저주를 받은 아들인 '샘'의 자손이기 때문이라는 설교를 들으면서, '인종 차별은 하나님이 의도하신건가?' 이라는 생각했다. 하나님을 하나님답지 못하게 하는 내용의 설교들을 들으면서 사람의 무지함이 하나님을 우리의 입맛과 상황에 맞게 설정된 'DIY 신'으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 교회에서 하는 말로 나는 "시험에 들었다". 교회에서는 말한다. 교회 열심히 다니고 봉사하면 본인과 자신의 가족이 축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언젠가는 치신다(?)고,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하나님이 좋은 말로 하실때 순종하라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는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을 피하고 잘먹고 잘살기를 소망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전하시는 목사님들이 계시기에 나는 아직 한국의 기독교에서 희망을 본다. 그 분들에게서는 한국 교회에 만연된 목사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찾아볼 수 없고 그저 나랑 똑같이 죄 많은 사람같다는 느낌이 든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성도들이 옳은 길을 가시는 그 분들 몰라보고, 목사님이 권위가 없고 말씀에 파워가 없다며 모든 문제의 확실한 정답을 제시해줄것 같은 권위로 똘똘뭉친 대형교회를 찾아간다는 것이다. 

방송 설교에서 자주 듣는 예화가 있다. 천국에 가면 세번 놀란다고 한다. 천국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없어서 한 번, 천국에 없을줄 알았던 사람이 있어서 한 번, 마지막으로 내가 천국에 있어서 한 번 놀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공식에 대한 설교는 계속된다. 마치 본인은 천국에 간다는 것을 확신한다는것 처럼, 자신은 놀랄일이 없을것 처럼 말이다. 과연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분노의 쓰나미가 어디로 덮칠것인지는 관심을 갖고 지켜보겠다. 그들이 정죄하는 타인들을 향할지 아니면 깨끗하고 바르다고 말하는 본인들을 향할지...


<한기총의 돈 선거를 고발하는 시사 프로그램. 출처: Youtub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