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일기

2010. 5. 23. 13:08인생 관찰 예능 | The Truman Show


고향에 내려온지 어느덧 만으로 3개월이 훌쩍 지나버렸다. 서울 생활에 염증을 느껴 다소 이른 나이(?)에 귀향으로 가장한 낙향을 했다. 고향에 처음 왔을때는 까치까치 설날이었다. 유난히도 눈이 많고 추웠던 겨울을 연탄과 함께 보내며, 편리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그 어느 해보다 따뜻하고 포근한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연탄을 가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버튼 하나면 더운물이 펑펑 나오고 적정 온도를 설정하면 알아서 보일러가 돌아가는 현대의 문명을 이곳에서는 잠시 잊게되었다. 어찌보면 나의 일상이 연탄의 교체 주기를 따라야 했던 것 같다. 외출을 했다가도 연탄불 생각에 집에 오는 발걸음을 재촉하기도 하고, 연탄 두 장을 모두 갈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하지만 연탄을 갈면서 들여마신 일산화탄소로 인해 칼칼한 목과 약간의 알딸딸함(?)으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닭 우는 소리를 듣기가 일수였다.
이렇게 연탄과 나의 바이오 리듬이 맞아갈때 쯤 되니, 어느덧 봄이 오고 있었다. 겨우내 숙성을 마친 메주 덩어리들이 봄볕으로 나왔다.
이제 메주의 건더기들은 된장이 되고, 국물(?)들은 조선간장이 되기 위해 각자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요즘은 조선간장을 보기 힘들다. 시중에 나오는 대부분의 간장은 왜간장, 즉 일본식 간장이다. 직접 메주를 띄워서 된장을 만들기 전에는 조선간장을 맛보기가 쉽지 않다. 조선간장은 특유의 구리구리한 냄세와 혀를 자극하는 짠맛이 특징이며 개인적으로 조선간장을 들기름과 함께 볶아서 만든 국물에 끓인 만두국을 매우 좋아한다. 군침이 돈다. 된장이 될 건더기들은 바로 장독으로 들어가지만 국물은 간장이 되기 위해 다시 오랜 시간을 끓여져야 한다.

이렇게 된장을 담그는 일을 시작으로 봄이 오는것을 느낄 수 있다. 새싹들이 돋아나고 시원한 봄비도 내린다. 이쯤 되면 우리 동네의 유일한 가게인 명지동광수퍼 걸린 양미리도 자취를 감추게 된다. 할미꽃도 굽은 허리를 일으켜 조심스레 올라오시고, 쥐들도 빠꼼히 고개를 내민다.

하지만 봄을 만끽하기도 전에 날씨가 무더워지고 점점 봄이라는 계절이 사라져가는 기분이 든다. 

봄이라서 그런지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서 주방에 가면 냄비 가득 미역국이 끓여져 있는 일이 잦아진다. 누구 생일도 아닌데 왠 미역국일까... 생각을 했지만, 이제는 안다. 미역국은 엄마의 부재를 의미한다. 이제는 미역국 냄비의 크기에 따라 엄마의 출타 기간을 가늠해 낼 수 있는 통찰력이 생겼다. 부인이 곰국을 끓이면 불안해 진다는 50대 남편들의 이야기가 조금은 가슴에 와 닿는듯 하다. 
참고로 미역국은 끓이면 끓일 수록 맛있다.

어머니의 미역국, 이번에는 짧은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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