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원

2010. 7. 15. 23:56인생 관찰 예능 | The Truman Show


사람은 본능적으로 누군가를 속였을때 큰 쾌감을 느끼는가 봅니다. '골탕' 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이 거짓말은 악의를 품거나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사기'와는 다른 개념이죠. 오죽했으면 일요일 밤마다 온 국민을 즐겁게 했던 이경규의 '몰레카메라'는 종영한지 15년 이상 지는 지금까지도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여전히 여러 오락프로에서 이를 활용하는 장면을 볼 수가 있을까요. 서양에서 넘어 온 '만우절'이라는 풍습을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벼운 장난이나 거짓말로 상대방을 속이는 행위는 사람들에게 큰 즐거움인가 봅니다.
 저는 이러한 골탕을 잘 먹어왔습니다. 내가 속는 모습이 즐거운지 친구들은 종종 나를 속이고 나의 당황한 모습을 보고 즐거워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제가 친구를 제대로 한 방 먹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10년을 벼르던 저는 이 기회를 놓지지 않았습니다.

Episode


사건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충주 헝아네 집에서 제천으로 돌아오는 기차편을 알아보기 위해, 회사에서 일 하고 있을 친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친구는 친절하게 시간을 알려주더니 저보고 인터넷 사용료 100원을 내라고 하더군요. 저 역시 흔쾌히, 알았으니 계좌번호를 문자로 보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친구는 문자로 계좌번호를 받으면 500원이 추가 된다고 하였지요. 친구의 장난에는 역시 같은 장난으로 받아치는게 최고라는 생각에 알았으니 600원을 계좌로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내일 저와 만나기로 되어있는 이 친구는, 내일로 넘어가면 60,000원이 될테니 알아서 하라는 무리수를 던지는 발언도 서슴치 않더군요. 어차피 인터넷 뱅킹으로 보내면 수수료가 없기때문에 통장에 험한 욕이 찍히도록해서 600백원을 진짜로 넣어 주는것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의 통장 번호와 600원이라는 정확한 금액이 찍힌 문자가 도착하더군요. 제천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지금까지 어리석게도 그의 거짓말에 놀아나며 울고 웃었던 저의 지난 날들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는 10년 넘게 이어온 그와의 소모적인 거짓말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방법을 떠올렸습니다.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Step 1. 그의 통장에 600원을 입금한다. 그의 통장에는 '7월특별상여금' 이라는 메모를 남긴다.
Step 2. 인터넷에서 그의 회사(C 제과) 본사 대표 번호를 입수한다. 
Step 3. 그리고는 그에게 문자를 보낸다. "[7월특별상여금]이입금되었습니다.계좌확인후미지급되었을시인사과로문의바랍니다." 물론 그의 본사 대표번호를 찍는다.
Step 4. 조용히 지켜본다.

그에게서 5분 내로 전화가 올꺼라는 예상과는 달리, 20분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저의 예상대로 라면 문자를 보고 뜻밖의 휴가상여금 소식에 놀란 그는 황급히 계좌를 확인할테고 '7월특별상여금'이라는 문구와 함께 찍힌 600원이라는 금액을 보고는 크게 실망하여 저에게 전화해서 욕을 퍼부었을텐데 말입니다. 물론 저는 그 욕을 들으며 묘한 쾌감을 느끼겠죠. 하하 ^^

20여 분 후, 그에게서 전화가 왔고 그는 매우 차분한 목소리로 저에게 말했습니다.
"야... 내가 졌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차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직 뭔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는 축 처진 목소리로 지난 20분 동안 있었던 일 들을 얘기해 주더군요.

회사로부터 온 문자(사실은 제가 보낸거죠)를 확인 한 그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휴가비가 나왔다는 생각에 바로 계좌를 확인했답니다. 하지만 600원이라는 금액을 보고는 저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이거 뭐가 잘못됐구나!' 라고 생각을 했답니다. 마침 사무실 경리가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 그는 지체없이 본사 인사과로 전화를 했답니다. 그리고는,

친구    : "수고 많으십니다. 경인지부 OOO 주임인데요. 이번 상여금요, 좀 잘못된거 같은데요?"
인사과 : "네? 저희 이번에 상여금 나간거 없는걸로 알고 있는데요?"
친구    : "그럴리가요. 본사 번호로 문자가 왔고, 또 제 통장에도 분명히 찍혔는데요?"
인사과 : "어머, 그래요? 얼마가 들어갔는데요?"
친구    : "네, 600원이요. 그래서 뭐가 잘못 된것 같아서 전화 드린거예요."
인사과 : "아... 그래요? 제가 그럼 급여팀에 한 번 알아보고 연락을 드릴께요."


전화를 끊은 그는 계속 생각했답니다. '뭐가 어떻게 된거지? 왜 난 600원 밖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 메신저를 통해 인사과 직원이 쪽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급여팀에 알아 본 결과 상여금이 나간 사실이 없으며 본사에서는 급여와 관련해서는 문자로 통보하는 일이 없다고... 그리고는 혹시 주변에 지인이나 친구분이 장난 치신건 아닌지 확인해 보시라고 했답니다. 쪽지의 마지막 구절을 읽고, 친구는 '아차!' 싶더랍니다. 창피해서 인사과 직원에게는 답장도 보내지 못하고 저에게 당했다는 슬픔과 자괴감에 빠져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저에게 전화를 했던 것입니다.
 
저의 장난이 국내 굴지의 제과회사 본사 급여팀에까지 영향을 미칠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한편 고작 한 시간 전에 했던 농담도 잊을 정도로 휴가비에 목말라 있는 제 친구와 대한민국의 셀러리맨들에게 무척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구요. 또한 친구의 어리버리한 행동이 회사 내에 퍼지고 피해사례로 접수되어 각 지점에 주의 공문이 내려오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짧고 통쾌하게 전쟁에 마침표를 찍으려고 했지만, 역시 복수는 복수를 낳는 법. 저에게 언제 닥처올지 모를 위협에 대비하여 항상 친구의 언행을 의심하고 다시 보는 자세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오랫만에 친구 덕에 크게 웃습니다.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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