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찾아서

2011. 6. 2. 05:34지속 가능한 발전 | Sustainable Development/교육 (Education)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장락동 천막집

 

산과 들을 내방 바닥인양 나뒹굴며 자연 속에서 마구 자랐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절로 입가에 미소가 묻어난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 편리하고 깨끗한 것들만 누리며 자랐다면 아마 지금의 이 미소가 지어지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물론 어린 나이에도 나름의 고민이 있고 가슴 시린 첫사랑의 아픔도 있었겠지만 하루 하루가 즐겁고 행복했던것 같다. 당시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나 누군가와의 비교에 의한 박탈감 같은 감정은 쉽게 느낄 수 없었던 시절이다. 심지어는 고3 수험생 시절에도 나에게는 좋은 대학보다는 일정 시간의 정상적인 수면이 더욱 중요했다. 새벽 1~2시 까지 학교에 남아 공부하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10시에 집으로 돌아와 엄마가 챙겨 놓으신 오예스를 먹고 잠자리에 들면 대학 진학에 대한 걱정 보다는 지금 먹고 있는 오예스의 촉촉하고 달콤한 맛에 만족했고 충분한 잠을 잘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행복했다.

운전병 후반기 교육

 

진정한 '경쟁'이라는 것은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해서야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내가 맞닥뜨려야 할 사회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도 그 때에서야 비로소 느꼈던 것이다. '경쟁'이라는 것에 길들여지지 않은 나로서는 당연히 뒤쳐지기 마련이었다. 어려서 부터 차근차근 경쟁에서 살아남는 '생존법'을 익혀왔던 친구들은 이러한 현실을 미리 예견이라도 한 듯 '승자'가 되기 위한 길을 차근차근 걸어가고 있었고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그 대열에 합류하지 못하는 내 자신과 처한 환경이 원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는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나도 다른 이들과 같은 '보통 사람'이 되고자 그들의 생활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취업을 위해 기업이 원하는 맞춤형 인재가 된다는 것은 굳게 먹은 마음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내가 어느정도의 조건을 충족 시켰을때 이미 다른이들은 그보다 더 높은 수준에 올라가 있었고 기업의 기준 역시 덩달아 올라가기 마련이었다. 끝이 없는 경쟁 속에서 나 자신의 모습은 점점 사라져가고 기업이 원하는 정형화된 인재상 (주로 창의력과 인성을 갖춘 글로벌 인재) 이라는 틀에 내 모습을 깍아내고 부풀려서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하는 나를 발견했다.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이러한 방법으로 소정의 성취를 맞본다고 하여도 그 이후의 삶이 결코 행복할 것 같지 않았다.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에 기업을 상대로 채용 공고를 내기도 했다. 기업이 맞춤형 인재를 원하듯, 개인도 맞춤형 기업을 원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에 본 블로그에 말도 안되는 채용 공고를 올린 적이 있다. <JMUK 2010 인턴 기업 공개모집>결과야 뻔하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나는 행복을 좇아 이곳 스웨덴에 왔다. 지속가능한 개발(Sustainable Development)이라는 학문을 통해 일단은 결코 지속가능해 보이지 않는 나의 삶의 지속가능성을 찾아보고 싶었다. 나이 서른에 만원짜리 한 장 쓰는데도 지출계획을 따져가며 고민해야하는 가난한 유학생이지만 먹고싶은 것 맘껏 먹고 소비할 수 있는 한국의 직장인들이 아직은 크게 부럽지 않다. 일단, 겉으로 보기에 스웨덴의 젊은이들은 대한민국의 젊은이들 보다는 행복해 보였다. 개개인의 속 사정을 다 알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은 따사로운 햇살의 느끼며 잔디밭에 드러 누워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있다. 좋은 직장, 높은 연봉에 목메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배운 것을 활용하며 일할 수 있는 곳이라면 기업의 간판이나 연봉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스웨덴 웁살라... 숲 속 오두막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

 

기본적인 생존을 보장하는 국가의 국민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그렇지 않은 국가에 사는 국민들에 비해 혀전하게 적은 것은 당연한 것이다.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의 사람들은 국가로 부터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을 보장받기 때문에 삶에 대해서 특별히 불안해 하지 않는다. 살기 위해서 아둥바둥 하지 않아도 다들 비슷하게 어느정도는 살아 진다는 얘기다. 요즘 대한민국의 아이들은 어떤가... 어려서부터 경쟁에 노출되어 수능 점수와 영어 실력이 평생의 삶을 좌우한다고 배우면 하루하루를 불안함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 경쟁에서 낙오되어 소위 말하는 브랜드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 더이상의 기회는 박탈되는 듯 보인다. 그래서 세상을 직접 경험하기도 전에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일찌감치 생을 포기한다. 개인의 나약한 정신에 의한 자살이 아닌 현세태가 낳은 타살이라 봐야한다. 우리 어른들에게 분명 책임이 있다.

긴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이하는 웁살라 시민들

 

불안감이 적은 사회에서는 사회 구성원들 간의 신뢰 수준도 높다.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에게 짧은 미소를 보내는 일은 사소한 일 같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결코 쉽지 않다. 길을 걸으며 미소를 지을 마음의 여유도 충분하지 않을 뿐더러,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누군가를 이겨야 내가 살아남는 사회에서 길들여진 우리의 마음과 안면 근육이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회를 만들고 서로 미소지을 수 없는 어두운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우리 개개인들의 탓인가? 아니면 서로를 신뢰할 수 없도록 만든 사회를 탓해야 하는 것인가? 둘 모두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어차피 우리 개인들은 사회을 구성하고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스웨덴 사회에도 어느정도의 빈부의 격차는 있겠지만 실제로 그 차이는 크지 않을 뿐더러 자신의 부를 과시하거나 드러내는 것을 매우 꺼려하는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누가 잘 살고 못 살고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대학교에서 강의하시는 교수님이 뒷자리에 우유 박스가 묶인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 하는 모습이 전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웨덴은 우리와 다른것이 너무나도 많다. 이제는 우리보다 개발을 일찍 시작한 이웃나라 일본의 사람들이 그들의 행복을 위해 사회를 어떻게 바꾸어 나가고 있는지 보고싶다.

대한민국과 그 속에서 살아가게 될 나와 후손들의 행복을 찾아서...